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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꿀팁ㆀ

백제 역사를 새로 쓴, 무령왕릉(1)


수준 높은 기술을 바탕으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문화강국 백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백제 중흥을 위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무령왕이 있습니다. 그가 꿈꾸고 이룩했던 나라가 오롯이 담겨있는 무령왕릉입니다. 뛰어난 예술감각과 첨단기술의 집합체였습니다. 적극적인 국제화 전략으로 동아시아 국제교류의 중심역할을 했던 백제의 역사 무령왕릉을 통해 다시 조명해 보겠습니다. 2015년 7월 독일 본에서 희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유네스코 주최로 치뤄진 제 39차 세계유산위원회 우리 문화재 가운데로 12번째로 백제의 역사 유적지구가 세계유산으로 이름을 올린것입니다. 문화강국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린 쾌거였습니다. 백제역사 유적지구는 지금의 공주와 부여 익산으로 이어진 역사유적지로 백제의 역사중 가장 탁월한 문화를 꽃피워 왔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유네스코 자문 심사기구인 국제기념물 유적 협의회 이코모스는 백제역사유적지구에 대해 고대 동아시아 왕국 사이의 교류증거를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또한 성곽과 건축물 왕궁리 유적이나 미륵사터 성곽 등 독특한 건축기술과 고분과 석탑에서 보여준 예술품이 사라져간 백제문화와 역사의 뛰어난 증거라고도 평가했습니다. 보편적인 가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백제문화유산이 백제 지역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고 중국이라든지 일본열도하고 교류관계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진정성, 정말 백제유적으로서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이 되었고, 그 다음에 완전성, 완전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 유적이 온전하게 제대로 관리 보존됐는가를? 확인해본결과 대체로 잘 보존되어 있다라고 하는 결론에 얻게 되어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백제 웅진시대를 이끌었던 공주 이곳에서는 백제역사유적지구 유네스코 등재 1주년 기념 특별전 '무령'전에 한창입니다. 우리에겐 무령왕릉으로 잘 알려진 무령왕의 삶을 잘 확인할 수 있는 유물들이 전시되었습니다. 지난 해 공주 부여 익산에 있는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세계유산으로 등재가 되었습니다. 공주에서도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이 등재됐습니다. 무령왕릉이 단연 대표적인 유적이라고 할 수가 있었습니다. 무령왕릉이 발견됨에 따라서 백제의 건축사와 종교 사상 그리고 유물의 우수성이 백제 문화의 탁월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되어 가장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난국을 극복하고 제2의 부흥기를 이끌었떤 중흥군주 무령왕 밖으로는 백제의 전성기를 이끌고 널리 백성을 보살폈던 치세는 사그라들던 백제의 새로운 등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적처럼 발견된 그의 사후안식처는 천오백년전 백제를 다시 반석 위로 올려놓았습니다. 찬란했던 무령왕의 일대기가 고스란히 기록된 무령왕릉은 백제문화가 얼마나 다채로웠고 훌륭했는지를 말해줍니다. 한나라의 지도자로 국가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백성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위대한 군주 무령왕입니다. 천오백년 동안 잠들어있었던 그의 무덤이 세상위로 드러난 순간 한국은 물론 고대 동아시아의 역사가 다시 쓰여졌습니다. 강력하면서도 찬란했던 백제 무령왕릉은 후대에게 증명하고 싶었던 타임캡슐이었습니다. 당시에 자료가 부족해서 역사를 복원하기 힘들어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1971년에 무령왕릉이 확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당시로 보면 여러가지 측면에서 의미를 볼 수 있었는데 특히 백제사같은 경우에는 백제가 고구려, 신라에 버금가는 문화자산을 가지고 있는 발전된 나라라는 것을 한 번에 입증할 수 있는 자료로 확인이 되었습니다. 한 번에 입증할 수 있는 잘로 확인이 되었습니다. 또 나아가서 한국사적 측면에서 보면 한국 고대사가 기왕에 삼국사기에 인식했던 것을 구체적으로 실증할 수 있는 자료를 만들게 된것 같습니다. 아마 70년대 이후로부터 한국 고대 백제사뿐만 아니라 한국 고대사를 볼 수 있는 시각을 바꿀 수있는 계기가 이 무령왕릉의 발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